한-눈에 보는 결론
“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계가 대거 정착했다”는 흔한 통념과 달리, 그 전쟁으로 일본인이 한반도에 장기 거주하며 혈연을 남긴 사례는 드뭅니다. 오히려 당시엔 조선인이 일본으로 끌려간 경우(도공·학자·포로)가 훨씬 많았다는 연구가 더 많습니다. (연합뉴스)
일제강점기(1910-1945)의 한-일 혼인도 전체 인구 대비 극소수였습니다.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조선 거주 일본-조선인 부부는
1912년 110여 쌍 → 1937년 1 206쌍으로 늘었지만
같은 해 조선의 배우자 전체 460 만 여 쌍 중 0.03 % 수준이었습니다. (역사넷)
장기간 거주한 일본인 약 70 만 명 가운데, 1945년 귀환하지 않고 남은 사람은 극히 소수였고, 이들의 자녀는 해방 직후 빠르게 한국 사회에 동화됐습니다.
대규모 게놈 연구(5 000명 이상)에서도 “일본 특이(特異) 유전 신호”는 통계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희박합니다.
한-일은 1 400 년쯤 전에 갈라졌고 이후 상호 유전자 흐름은 제한적이었다는 추정이 우세합니다. (PMC)
반대로 일본인은 평균 85 ∼ 90 % 정도의 ‘한반도(야요이)계’ 조상을 공유한다는 최신 고(古)DNA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PMC)
→ 요컨대 한국 내 “일본 피” 비중은 역사·유전 양쪽 모두에서 매우 작아, 인구 전체의 유의미한 비율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세부 근거 ― 역사 자료
시기 | 일본계 인구 흐름 | 혼인·동화 규모 |
임진왜란 (1592-1598) | 일본군 15-20만이 일시 주둔했으나 전쟁 종료와 함께 대부분 철수. 일부(귀화 장수 김충선 등)만 남아 성씨·후손이 존재 | 후손 수를 집계할 만큼 큰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았음 |
17~19세기 조선통신사·왜관 교역 | 부산 왜관(倭館)에 상주 인원 300 명 안팎. 가톨릭 박해기 이후 사실상 소멸 | 교역 목적이어서 정착·혼인은 예외적 |
일제강점기 (1910-1945) | 1910년 17 만 명 → 1943년 74 만 명으로 일본인 거주민 급증 | 1912-1937년 조선 내 한-일 혼인 누계 1 206쌍 (0.03 %)(역사넷) |
해방 직후 (1945-1946) | 일본인 65 만 여 명 본국 송환. 남은 사람은 천여 명 추산 | ‘내선(內鮮)혼혈’ 2-3만 명 추정, 대부분 한국 국적 취득 후 동화 |
자세한 법·통계 정리는 ― 김영달, 「朝鮮統治下 ‘通婚’과 ‘混血’」(關西大 1999)·이정선 박사논문 등. (CiNii, 오사카대학교 학술정보구축)
세부 근거 ― 유전‧게놈 연구
연구 | 데이터/방법 | 시사점 |
Pan & Xu 2020, Hereditas (PMC) | 3 개국(한·중·일) 대규모 WGS 메타 리뷰 | 한·일은 PCA·FST에서 명확히 분리. 최근 세대 교잡(>5 %) 없으면 대부분의 분석에서 탐지 불가 → “거의 없거나 매우 약” |
Kim et al. 2024, Commun Biol (Yayoi Doigahama 고DNA) (PMC) | 고(古) DNA 2 300 년 전 Yayoi 1인 + 현대 집단 qpAdm | 현대 일본: Jōmon 6-7 % + ‘한반도(동북아)계’ 93 % 구성. “유전자 흐름의 주 방향이 한반도 → 일본” |
Xu 2020 외 동아시아 게놈 리뷰 (PMC) | 5 000+ 명 전체 염기서열 | 한·일 분기 시점 ~1 400 년 전·이후 제한적 gene flow, 韓 집단 내 이국(異國) 기원 segment < 1 % |
“일본계 후손” 규모를 어떻게 볼까?
통계적으로는 ‘미량’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 총인구 약 2 천만 명 중, 법적으로 일본 국적을 유지한 사람은 0.05 % 미만.
혼혈 2-3만 명도 2세대만 지나면 (대략 1/4 → 1/8 → …) 일본계 유전자 비율이 5 % 아래로 희석됩니다.
유전적으로는 ‘검출 한계 이하’
대형 코호트 4 – 5 천 명 샘플에서 일본 특유 Y-염색체 하플로그룹(D1b 등) 빈도는 0.1 % 이하로 보고됩니다(개별 발표).
문화·성씨 흔적은 존재
김충선(金忠善)·김씨(사야가김) 같은 소규모 왜계 성씨, 경남 일대 ‘왜성’ 주변 토착화된 가족 등이 연구 사례.
더 찾아보면 좋은 자료
주제 | 참고문헌·데이터 |
일제강점기 혼인 정책·법제 | 金英達(1999) 「日本の朝鮮統治下における『通婚』と『混血』」 (CiNii) |
‘내선(內鮮)결혼’ 혼혈 2세 인터뷰 | 戦後日本へ引揚げた日本인 여성 사례 분석 (오사카대학교 학술정보구축) |
한국-일본 게놈 비교 | |
임진왜란 포로·교류 | 연합뉴스 「임란 포로 후손 400년 만의 상봉」 (연합뉴스) |
정리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본 혈통”을 유전학적으로 구분할 만큼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는 않습니다.
임진왜란 때보다는 일제강점기의 소수 혼인·혼혈이 후손으로 이어졌지만, 해방 후 동화·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구 통계·게놈 수준에서는 미미한 비중으로 남았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 피가 섞인 후손이 지금도 많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학계의 대답은 “있긴 하지만, 전체로 보면 극소수”입니다.
궁금하시다면 개인 DNA 분석(예: DTC 검사)과 가족 족보 탐색을 병행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결과를 해석하실 때는 ‘공동의 한반도-일본 고대 조상’과 ‘근현대 일본 조상’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을 꼭 유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