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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엘리엇 선교사 현대의 유명한 개신교 선교사들 중에는 제임스 엘리엇트(James Elliot) 선교사도 있습니다. 

현대의 유명한 개신교 선교사들 중에는 제임스 엘리엇트(James Elliot) 선교사도 있습니다.     궁금한데요, 제임스 엘리엇 선교사는 어떤 것으로 잘 알려진 분이예요?    제가 대강 알기로는 플리머스 형제교회의 소속 선교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자세하게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감사합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ai 답변을 가져다가 복사붙이기 하면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사실상 ai 답변을 자기가 작성한 것인 양 질문자와 독자들을 속이는, 재림 안식교 이단이 와서 답변을 달면 그런 답변을 채택하는 것은 이단들의 활동을 적극 돕는 것이 되니 이점 주의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는 자료들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선교사 엘리엇에 대해서는 교회사를 읽을 때마다 항상 읽지만 기억력이 없어서 자료를 올립니다.

제임스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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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제임스 엘리엇(Philip James Elliot, 1927년 10월 8일 ~ 1956년 1월 8일)는 미국침례교회 선교사이다.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및 세계 성서번역 선교회(WBT)선교사이며, 에콰도르 원주민 선교시작시에 순교하였다.

생애[편집]

제임스 엘리엇은 1927년 10월 8일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아버지 프레드(Fred)와 스위스 출신의 어머니 클라라(Clar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제임스는 1945년 가을 일리노이주서부 시카고에 위치한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 학교인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1]에 진학하여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교를 위해서 생애를 바치기로 작정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SIL 교육기간을 거쳐 1952년에콰도르에 도착한 제임스는 와오라니 (waoran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현지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함께 선교활동을 할 친구들을 모았다. 몇 달 전부터 비행기를 이용하여 선교방송과 함께 선물꾸러미를 투하하 접촉을 준비한 제임스와 일행 4명(네이트 세인트,피트 플레밍,로저 유드리언,에드 맥컬리)은 1956년 1월 8일 와오라니 (waorani) 부족민들과 직접 접촉하려고 했으나, 백인에 대해 적대적인 원주민들의 창 공격을 받아 전원 사망했다.

제임스의 아내 엘리자베스(Elisabeth)는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에 그녀 역시 목숨을 걸고 남편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다. 엘리자베스가 만나 본 아우카 부족은 남자 어른이 8명에 불과한 56명의 작은 부족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예수복음을 전하고 미국으로 돌아 온 후 1961년The Savage, My Kinsman》이란 책을 펴냈다.//

https://wiki.onul.works/w/%EC%A0%9C%EC%9E%84%EC%8A%A4_%EC%97%98%EB%A6%AC%EC%97%87

제임스 엘리엇

1. 개요

제임스 엘리엇은 1927년 미국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1956년 에콰도르에서 선교 활동 중 와오라니족에게 살해당한 미국의 선교사이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 양심적 병역 거부를 고려할 정도로 종교적 신념이 강했으며, 언어학을 공부하고 에콰도르에서 케추아족 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와오라니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료 선교사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1956년 1월 8일 부족 전사들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 개신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그의 사후에도 에콰도르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삶과 죽음은 여러 책과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기독교인들에게 헌신의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2. 초기 생애

제임스 엘리엇은 1927년 10월 8일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프레드 엘리엇(Fred Elliot)이었고, 어머니는 스위스 출신의 클라라 엘리엇(Clara Elliot)이었다. 프레드의 조부모는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첫 세대였고, 클라라의 부모는 20세기 초 스위스에서 워싱턴주 동부로 이주해 목장을 운영했다. 부모는 포틀랜드에서 만났는데, 당시 클라라는 카이로프랙터 공부를 하고 있었고 프레드는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여 플리머스 형제단 운동의 순회 설교자로 활동했다.[2] 짐 엘리엇은 셋째 아들이었으며, 위로는 시애틀에서 태어난 로버트와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허버트 형이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제인이 있었다.

엘리엇의 부모는 확고한 기독교 신념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했다. 가족은 함께 교회에 다니고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었으며, 가정에서는 순종과 정직함이 강조되었다. 엘리엇은 여섯 살 때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모험심을 장려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고 격려했다.

1941년, 엘리엇은 벤슨 폴리테크닉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건축 도면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학교 신문, 레슬링 팀, 학교 연극, 연설 클럽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연기 실력이 뛰어나 일부 교사들은 배우의 길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웅변 능력 또한 주목받았다. 특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서거 몇 시간 후 그를 기리는 연설을 준비하여 발표했을 때, 한 교직원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엘리엇은 자신의 말하기 능력을 신념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한 급우는 엘리엇이 학교 파티 참석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학생회장에게 성경을 인용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에 정치 연설을 거부하여 연설 클럽에서 퇴학당할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아프리카 노예제 폐지를 위한 무력 사용에 반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징집될 경우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3. 선교 헌신

1945년 가을, 제임스 엘리엇은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복음주의 기독교 학교인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7]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자신의 삶을 선교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향 교회가 영적으로 풍족한 상태라고 생각하며, 해외 선교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여겼다.

1950년 여름, 엘리엇은 오클라호마에 있는 카메론 타운젠드의 언어학 훈련 캠프 '캠프 위클리프'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그는 케추아족 선교사로부터 언어를 기록하는 기술을 배웠고,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진 에콰도르의 원주민 부족, 화오라니족(당시 '아우카족'으로도 불림)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7월까지도 그는 에콰도르와 인도 중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의 부모와 친구들은 그가 미국 내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엘리엇은 해외 선교에 대한 강한 소명을 느꼈다.

대학 졸업 후 엘리엇은 SIL에서 언어학 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여권을 신청하고 친구 빌 캐더스와 함께 에콰도르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캐더스가 결혼 계획을 알리면서 동행은 무산되었다. 1951년 겨울과 봄, 엘리엇은 친구 에드 맥컬리와 함께 체스터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감옥에서 설교하며 전도 집회를 여는 등 다양한 사역 활동을 했다.

맥컬리 역시 그해 여름 결혼하면서, 엘리엇은 에콰도르에서 함께 일할 새로운 동역자를 찾아야 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피트 플레밍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플레밍은 9월까지 에콰도르 선교에 대한 부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시기 엘리엇은 동부 해안의 친구들을 방문하던 중 미래의 아내가 될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그는 일기에 결혼에 대한 소망을 적었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 없이 에콰도르로 가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고 기록했다. 1951년 11월, 엘리엇은 포틀랜드로 돌아와 에콰도르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고, 1952년 봄 마침내 에콰도르에 도착하여 화오라니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4. 에콰도르 사역

1950년대 초, 제임스 엘리엇은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남아메리카의 에콰도르로 향했다. 그는 1952년 에콰도르에 도착하여 동료 선교사 피트 플레밍과 함께 안데스 산맥 지역의 케추아족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엘리엇은 케추아족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데 힘썼고, 이 기간 동안 휘튼 칼리지 동문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케추아족 사역 중 엘리엇은 외부 세계와 거의 접촉이 없었던 아마존 우림의 와오라니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와오라니족은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부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아우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엘리엇은 이들에게도 기독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와오라니족과의 접촉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훗날 '아우카 작전'으로 알려지게 된다.

4. 1. 케추아 부족 선교

엘리엇은 친구 피트 플레밍과 함께 케추아족을 전도하기 위해 1952년 2월 21일 에콰도르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키토에 머물렀으나 이후 정글 지역으로 이동하여 샨디아 선교 기지에 정착했다. 1953년 10월 8일, 엘리엇은 키토에서 휘튼 칼리지 동문이자 선교사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간소한 시민 결혼식을 통해 결혼했다. 에드 맥컬리와 마릴루 맥컬리가 결혼식 증인이었다. 부부는 파나마와 코스타리카로 짧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에콰도르로 돌아왔다. 1955년 2월 27일에는 외동딸 밸러리가 태어났다. 엘리엇은 케추아족과 함께 사역하면서 와오라니족에게 접근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4. 2. 와오라니 부족 선교 (아우카 작전)

1950년 여름,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카메론 타운젠드의 언어학 훈련 캠프인 캠프 위클리프에서 엘리엇은 케추아족 선교사로부터 에콰도르 원주민인 와오라니족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당시 와오라니족은 외부인에게 매우 폭력적이고 위험한 부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아우카'(Aucaauc)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엘리엇은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에콰도르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친구 빌 캐더스와 동행할 계획이었으나, 캐더스의 개인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일리노이주 체스터에서 에드 맥컬리와 함께 잠시 사역하다가, 워싱턴 대학교 출신의 피트 플레밍과 뜻을 모아 에콰도르로 가기로 했다. 엘리엇과 플레밍은 1952년 2월 21일 에콰도르에 도착하여 케추아족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키토에 잠시 머문 뒤 정글 지역의 샨디아 선교 기지에 정착했다.

1953년 10월 8일, 엘리엇은 휘튼 대학교 동문이자 선교사인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키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에드 맥컬리 부부가 결혼 증인이었다. 1955년 2월 27일에는 외동딸 밸러리(Valerie)가 태어났다. 케추아족과 함께 생활하며 사역하는 동안, 엘리엇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던 와오라니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엘리엇은 동료 선교사인 에드 맥컬리, 로저 유데리안, 피트 플레밍, 그리고 조종사 네이트 세인트와 함께 '아우카 작전'으로 알려진 와오라니 부족 접촉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몇 달 동안 파이퍼 PA-14 항공기를 이용하여 와오라니 부족 마을 상공을 비행하며 확성기로 우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바구니에 선물을 담아 내려보내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56년 1월, 엘리엇과 네 명의 동료들은 쿠라라이 강 강변에 '팜 비치'(Palm Beach)라는 이름의 임시 착륙장과 기지를 건설하고 와오라니 부족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준비했다. 얼마 후, 세 명의 와오라니 부족민(남성 1명, 여성 2명)이 기지를 방문했고, 선교사들은 이들과 우호적인 시간을 보냈다. 특히 선교사들이 '조지'(Naenkiwi|나엔키위auc)라고 이름 붙인 젊은 남성은 네이트 세인트가 조종하는 비행기에 잠시 타보는 등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긍정적인 접촉은 선교사들에게 와오라니 부족과의 평화로운 만남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5. 순교

에콰도르에서 와오라니(Waoran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제임스 엘리엇은 몇 달 전부터 비행기를 이용해 선교 방송과 함께 선물 꾸러미를 투하하며 접촉을 준비했다.[7] 그와 동료 선교사 4명(네이트 세인트, 피트 플레밍, 로저 유드리언, 에드 맥컬리)은 1956년 1월 8일, 쿠라라이 강변에서 와오라니 부족민들과 직접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백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원주민들의 창 공격을 받아 엘리엇을 포함한 5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순교로 여겨진다.

엘리엇과 에드 맥컬리를 기념하는 휘튼 대학교

이 사건은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에 10페이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4]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이 순교한 지 2년 후인 1958년 가을,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와오라니 부족을 찾아가 남편이 못다 이룬 복음 전파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후 남편의 삶과 죽음을 다룬 책 ''전능자의 그림자: 짐 엘리엇의 삶과 유언''과 ''영광의 문을 지나'' 등을 출판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엘리엇의 뒤를 이어 와오라니족 사이에서 사역을 계속했다.

엘리엇과 동료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콜로라도주 덴버에 짐 엘리엇 크리스천 스쿨이, 1997년 캘리포니아주 로디에 짐 엘리엇 크리스천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5] 또한 이들의 이야기는 2002년 다큐멘터리 ''영광의 문 너머''와 2006년 극영화 ''창의 끝'' 등으로 제작되었다. 2003년과 2007년에는 싱가포르에서 뮤지컬 ''무엇보다도 사랑''이 공연되기도 했다.

수잔 마틴스 밀러는 그녀의 저서 ''짐 엘리엇: 에콰도르 선교사''[6]에서 엘리엇이 휘튼 대학교 재학 시절 남긴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6. 사후

''라이프''는 엘리엇과 그의 동료 선교사들의 죽음에 관한 10페이지 분량의 기사를 게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4]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화오라니족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으며, 남편의 삶과 신앙을 기록한 책들을 출판했다. 엘리엇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학교들이 세워지기도 했다.[5] 그의 이야기는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되었다.

엘리엇은 휘튼 대학교 재학 시절 남긴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로도 잘 알려져 있다.[6]

6. 1.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사역

제임스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남편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와오라니 부족(당시 아우카족으로 불림)을 찾아갔다. 이는 남편이 이루지 못한 사역을 이어가기 위한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만난 부족은 남자 어른 8명을 포함해 총 56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1961년 《''The Savage, My Kinsman''》(내 친척 야만인)이라는 책을 펴냈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엘리자베스와 다른 선교사들은 와오라니족 사이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복음 전파 활동을 계속했다.[4] 그녀는 남편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두 권의 책, 《''전능자의 그림자: 짐 엘리엇의 삶과 유언''》과 《''영광의 문을 지나''》를 추가로 출판하여 남편의 신앙과 헌신을 널리 알렸다.

6. 2. 영향

짐 엘리엇과 동료 선교사들의 죽음은 미국의 유명 잡지인 ''라이프''에 10페이지 분량의 기사로 실리면서[4]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한국 개신교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삶은 선교에 대한 헌신의 모범으로 여겨져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화오라니족 사이에서 복음 전파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남편의 삶과 죽음을 다룬 책 ''전능자의 그림자: 짐 엘리엇의 삶과 유언''과 ''영광의 문을 지나''를 출판하여 엘리엇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엘리엇을 기념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1991년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짐 엘리엇 크리스천 스쿨이 세워졌고, 1997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디에 짐 엘리엇 크리스천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5]

엘리엇의 이야기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다큐멘터리: 2002년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광의 문 너머''가 개봉되었고, 2007년에는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의 이야기를 다룬 ''스티브 세인트: 정글 선교사''가 제작되었다.

영화: 2006년에는 동료 선교사였던 네이트 세인트와 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가 에콰도르 원주민에게 접근하는 과정을 그린 극 영화 ''창의 끝''이 개봉되었다.

뮤지컬: 2003년 싱가포르의 빅토리아 콘서트 홀에서는 짐과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무엇보다도 사랑''이 공연되었으며, 2007년 NUS 대학교 문화 센터에서 재공연되었다.

애니메이션: 2005년에는 ''토치라이터: 짐 엘리엇 이야기''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짐 엘리엇은 휘튼 대학교 재학 시절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6]

7. 저서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영어):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저술했으며, 그의 생애와 신앙을 다룬 책이다. 한국어판은 윤종석이 번역하여 복있는 사람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Papers of Philip James Elliot – Collection 277 http://www.wheaton.e[...] 2010-02-21

[2] 서적 Jim Elliot: Missionary Martyr https://books.google[...] Barbour 2015-09-13

[3] 뉴스 They Were No Fools: The Martyrdom of Jim Elliot and Four Other Missionaries https://www.thegospe[...] 2020-01-19

[4] 뉴스 'Go Ye and Preach the Gospel': Five Do and Die. Life Magazine. 10-19. 1956-01-30

[5] 웹사이트 Jim Elliot Christian High School http://www.jechs.com jechs.com 2015-09-13

[6] 서적 Jim Elliot: Missionary to Ecuador Authentic Books 1997

[7] 문서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 학교//

https://www.youtube.com/watch?v=7IaX1H7qQic&t=1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