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조선인이 남태평양이나 괌까지 직접 탐험하거나 표류하여 원주민을 만났다는 공식적이고 명확한 기록은 찾기 어렵습니다.
조선과 해외 교류의 한계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주의와 사대주의를 근간으로 삼아 해상 활동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해금 정책: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략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로는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과 유사하게 국가적으로 민간의 해상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외의 지역으로의 광범위한 해상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교류 범위의 제한: 조선은 주로 **중국(명, 청)과 일본(쓰시마 섬 경유)**을 중심으로 한정적인 외교 및 교역 활동을 펼쳤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조선 초기에 일부 사절 교환이 있었지만, 활발한 정치적 관계나 교역·문화적 교류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실록에도 동남아 국가와의 교류 기사는 매우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 사례와 그 의미
말씀하신 **문순득의 표류(1801~1805년)**는 조선인이 경험한 가장 광범위한 해외 표류 기록 중 하나입니다. 그는 흑산도에서 홍어를 싣고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에 표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중국(청)으로 가려다 또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呂宋國, 지금의 필리핀)에 표착하게 됩니다. 이후 마카오, 광저우, 난징, 베이징을 거쳐 3년여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죠.
문순득의 기록은 **정약전의 『표해시말(漂海始末)』**에 상세히 담겨 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외국, 특히 동남아시아에 대한 매우 귀중하고 생생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그가 필리핀에서 서양 문물과 현지 언어를 접한 경험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문순득의 사례는 '탐험'이라기보다는 '표류'에 가깝고, 그 목적지는 필리핀이었습니다. 필리핀은 남태평양에 속하는 섬나라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남태평양'이라고 부르는 마이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의 수많은 섬들(괌, 하와이, 피지, 타히티 등)과는 지리적으로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 경로가 그보다 더 남쪽이나 동쪽, 즉 괌이나 다른 남태평양 섬들로 직접 이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남태평양 및 괌과의 직접 교류 기록 부재
조선 시대에 조선인이 남태평양이나 괌까지 표류했다는 기록이 없는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항해 기술의 한계: 조선의 선박 기술은 연안 항해에 최적화되어 있었고, 망망대해를 장기간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원양 선박이나 정교한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북태평양의 거친 해류와 계절풍, 그리고 방대한 태평양의 규모를 고려할 때, 우발적인 표류만으로는 남태평양까지 도달하기가 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리적 인지의 부재: 조선은 서양과 달리 세계 지리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동아시아를 벗어난 먼 바다와 섬들에 대한 개념 자체가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발적 접촉의 어려움: 유럽인들이 세계 각지를 항해하며 새로운 대륙과 섬들을 발견했던 것은 그들의 선박 기술과 지리적 탐험 욕구 덕분이었지만, 조선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표류의 경우에도 주로 중국 연안이나 일본, 유구국(오키나와)과 같은 비교적 가까운 지역으로 한정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순득과 같은 극히 드문 표류 사례를 제외하고는, 조선인이 의도적으로 남태평양이나 괌을 탐험하거나, 표류를 통해 그곳 원주민들을 만났다는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한 역사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나 남태평양 지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